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의 성전 정화 (문단 편집) === 해설 === * 참고 자료 : [[https://songsin.catholic.ac.kr/common/download.do?key=12&mode=DOWNLOAD&post=18&file=95|#]],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401931#none|#]] >...우리는 우리가 가진 현대적 선입견들로 1세기를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흔히 예수가 [[대제사장]] 계급에서 일어난 타락에 대해 항의한 것이라는 가설 역시 문제가 많다. 또한 성전의 제사장들이 희생 동물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금전 거래 시 한쪽에 치우친 방법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자주 제기되곤 하는데, 이는 분명 가능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제사장 계급이 대체로 부패했었다는 고대의 증거는 없다. 또한 예수의 그러한 항의가 이곳 외에 그가 가르친 내용에서 중요하게 드러난 경우도 없다. >----- >[[http://www.yes24.com/Product/Goods/91100390|예수 한 권으로 읽는 역사, 헬렌 K. 본드 저]]에서 발췌 일반인들에게 피상적으로 알려진 부분이 많아,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뿐더러 현대의 가치관을 멋대로 투영하는 해석을 많이 당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가치의 변화와 인간의 주관적 시선이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학자적 접근으로 이를 받아들이면 실망하거나 흥미를 잃기 쉽지만 역설적으로 피상적 혹은 투영적으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예수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농담인 예수무쌍이 한 예로 여리여리해 보이는 예수의 이미지는 강건한 이미지로 바꾸었고, 단순히 종교적 메시아에서 현대에도 통할 부당한 권력에 맞선 위대한 성인으로 그려질 수 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지중해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성전 앞마당의 장사판은 성전의 기능을 보조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었고, 법적으로 허용된 일이었을 뿐더러 많은 평범한 예루살렘 시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기대는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곳이었다. 성전에서의 상거래를 도덕적으로 옳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성서학자가 없지는 않으나[* [[성공회]] 사제 박태식(괴팅겐 대학교 신학박사)은 '강도의 소굴'(마르 11,17)이 상인들에게 한 저주의 말이라고 본다.(박태식, 《거룩한 독서를 위한 신약성경 주해 2: 마르코 복음》, 바오로딸, 2012, 206쪽] 21세기의 사목자에 대한 반감을 AD 1세기에 투영해서 파악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 다만 제사장들이 미리 상인들과 짜고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러 가져온 제물에 흠을 잡아 그것으로 제사를 못 드리게 한 다음,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제물을 사도록 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2번째로 짚고 넘어갈 오해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 자체를 문제시했다는 오해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다인이었으며,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늘 관건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개인주의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사와 종교사 그리고 종교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러했다."'''{{{-2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246쪽)}}} 물론 1세기 그리스도교가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사두가이)과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바리사이 역시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바리사이들이 사두가이들과 긴장을 이루었다고 해서 바리사이를 성전 혐오자로 볼 수 없듯이, 예수(그리고 그의 제자들) 역시도 성전 혐오자가 아니었다. 클라우스 베르거(Klaus Berger)가 지적했듯이,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사가는 2장 17절에 시편 69, 10을 인용하며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일을 옳다고 평가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제식을 맹렬히 비판하여 성전을 없애려 했고 성전제식을 모두 폐지하기를 원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말은 제식과 전례에 대한 거부감을 예수의 삶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가 한 번도 성전을 방문한 적이 없고{{{-2 (앞의 텍스트 외에 마르 12장 성전에서의 예수의 가르침 참조)}}} '성전 정화'{{{-2 (환전상과 가축 상인들을 몰아냄)}}}는 성전제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헌금이나 기부를 해야 할 거룩한 장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행위{{{-2 (가난한 과부의 헌금 대목[* 발췌자 주석: 이 부분에도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텍스트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비판하지 않는다. 주석가 중에는 예수가 과부를 사제들이 착취하는 희생양으로 묘사하려 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다. 과부가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류에 빠져(!) 모든 것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남는 것만 헌금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나 텍스트에 그런 언급은 없다."{{{-2 (베르거, 같은 책, 169쪽)}}} "예수는 성전을 정화할 때 그곳에서 판치고 있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 성전은 돈을 긁어모으는 곳이 아니라 주는 곳인데, 그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서 바로 그렇게 한 것이다. 사도 6장에 의하면 성전은 과부들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급받는 곳이다. 이렇듯 자선을 청하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바로 그곳에서 그 가난한 과부는 관계를 확 뒤집어 놓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놓는다. 1베드 4,8과 잠언10,12 그리고 야고 5,20에 의하면 자선은 죄를 없앤다."{{{-2 (같은 책 169쪽)}}}] 참조)}}}를 금지한 것을 그렇게 왜곡한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가 성전제식을 거부한 모습은 최후만찬 예식에서 극에 달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하는 새로운 희생양으로 세우기 위해 빵과 포도주에 대한 말로 성전제식을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제식은 속죄 제물과 속죄의 날{{{-2 (욤 키퍼)}}}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런 주석은 전례와 '제식 규정'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다교 전례에서도,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도 목표가 같은 한 가지 길이 다른 길을 자동적으로 막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두 갈래 길은 서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두 가지 길을 잘 활용하면 영적으로 유익하다. 유다교에서는 죄의 사함은 기도나 성전에 제물을 바치는 일뿐 아니라, 자선 행위로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대로 실행했다. 그러므로 대속을 위한 예수의 죽음이 그 자체로 성전의 역할을 없애리라는 뜻으로 여긴다면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히브리서도 예수가 이러한 이유로 대사제직과 하늘나라의 성전을 논증해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당연히 성전에 모였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평생 그곳에서 보냈다. >예수가 흘린 피{{{-2 (수많은 성전 제물 대신에)}}}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면, 성전제식을 그 피의 상징이나 재현으로 볼 수 있고 본질적인 것의 모사{{{-2 模寫}}}로 인정할 수 있다{{{-2 (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요약하면, 에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히 여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더불어 예수도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심판한다는 말을 성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 표현했다. 성전을 이스라엘의 심장으로 보는 사람만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슬퍼할 수 있었다. 예수는 결코 성전과 제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예수도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의 징조나 실제 상징으로 본 것이다. ...... 예수가 가시적 제식의 형상인 성인, 성전, 기도, 제물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예식을 거부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다. 복음에는 예수가 제식을 폐지하고 윤리만 내세우는 대목이 없다.''' 물론 예루살렘이 예수에게 두 얼굴을 보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자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예수는 성전도 당연히 사랑했다. >---- >-클라우스 베르거, 《예수》 2권, 전헌호 옮김, 성바오로, 2013, 123-125쪽 >품위없는 것은 성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과 상종하는 형태다. 그렇다면 예수의 행동은 의식변화를 부르짖는 열정적 호소, 회개의 호소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다른 제도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에 끼이게 되는데, 율법관행인 안식일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맞게 재생시키고자 한 것과 마찬가지다.[* (책 속 주석)참조: J. Roloff, ''Das Kerygma und der historische Jesus (Göttingen 1970) 96: "이렇게 성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것과 정확히 부합한다."] >----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https://www.bundobook.co.kr/goods/view?no=1701|《나자렛 예수》{{{-2 (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정한교 번역, 분도출판사, 370쪽. >예수는 반항아도 아니고 개방적인 자유주의자도 아니다. 그분은 예언자로서 토라를 해석하신 분이다. 그분은 토라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하신다. >----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제1권, 박상래 옮김, 바오로딸, 2012, 199쪽. 또한 이방인인 로마인들 역시도 성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전에 대항하는 예수의 그런 행동을 보자 그들 쪽에서도 예수를 체포하자는 대제관들의 요청에 응해 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신전 모독은 가장 악랄한 중죄로 취급 되었다. 유다교는 엄연히 로마 제국이 인정한 '국가 공인 종교들' 중 하나였으며, 다신교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야훼는 (비록 유다인들이 이해하던 신관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경외로운 신이었다.] >당국이, 또한 로마 당국도, 자기를 반대하는데 대한 마지막 수단으로 터트린 것이 성전 상거래에 공격을 감행한 저 성전저항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그중에도 특히 사두가이 파 대제관들에게 성전이 이스라엘 신심의 본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점령세력인 로마인들도 평정된 각 민족의 신들을 존중했고 따라서 야훼도 존중하여 성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성전에서는 날마다 로마인들을 위한 기도가 있었고, 그런만큼 성전에 대항하는 예수의 그런 행동을 보자 그들 쪽에서도 예수를 체포하자는 대제관들 쪽의 요청에 응해 줄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 >-요아힘 그닐카{{{-2 (Joachim Gnilka)}}}, 방송 대담[* 1992년 5월 28일, 독일 Bayern 방송국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톤 켄테미히가 뮌헨 신약학자 요아힘 그닐카에게 묻는다」(Jesus, der Christus. Anton Kentemich befragt den Müncher Neutestamentler Joachim Gnilka)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대담. 번역은 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434-435쪽] 게다가 공관복음서에서 성전 정화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맥락에서 서술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에서 메사아적 암시를 이미 하였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메시아'를 인정하는 장면이 더 뒤의 장면인 14장 61-62절에서야 나오지만, 예수가 메시아적 암시는 그 이전에도 하였다.] >오늘날 모든 독자가 곧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마르코 복음서가 묘사하는 입성이 임금의 입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서의 환호는 축제를 앞두고 성전에 들어서는 일단의 순례자 무리를 맞으며 외치는 일반적인 환호 소리가 아니다.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오히려 임금이 자신의 도시로 입성하는 것, 메시아가 시온에 들어서는 것이다. 임금은 말하자면 이 도시를 자신의 수중에 넣기 위해 들어온다.''' >바로 이것이 이 이야기의 의도임을 어린 나귀가 보여 준다. 구약에서 어린 나귀는 메시아가 타고 올 짐승이다. 즈카르야서 9장 9절과 창세기 49장 11절이 그렇게 말한다. '어린 나귀'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예수님의 입성 이야기가 즈카르야서 9장 9절을 반영하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책 속 주석)요한 12,12-19는 즈카르야의 본문을 명시적으로 인용한다. 반면 마르코는 이름 암시할 뿐이다.] 그 구절을 보자.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것이 '임금다운' 입성임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지들이 있다. 고대 도시들은 나뭇가지들과 겉옷들을 길에 깔고 통치자를 맞이했다. 그리고 본래 간구의 외침이었던 '호산나{{{-2 (도와주소서!)}}}는 여기서 이미 구원과 경배의 외침으로 바뀌어 있다. '호산나'가 원래 하느님께 드리는 외침임을 감안하면, 이 외침은 적어도 "오시는 분은 찬미받으소서!"라는 찬양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찬양이 예수님에게 쏟아진다. '''결국 이 이야기는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들어 오는 임금의 입성을 묘사한다.'''[* (책 속 주석)이에 대해서는 고대 사회의 수많은 사례가 있다. 참조: 특히 E. Peterson, "Die Einholung des Kyrios", in:''ZSth'' 7(1930), 682-702. 경외심의 표지로 옷을 펼처 깔아놓는 예는 2열왕 9,13과 『빌라도 행전''Acta Pilate''』 I,2를 보라.] >---- >-[[http://www.yes24.com/Product/Goods/20202626|《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2 ''[[https://www.amazon.de/-/en/Gerhard-Lohfink/dp/345134095X/ref=tmm_hrd_swatch_0?_encoding=UTF8&qid=&sr=|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http://ch.yes24.com/Article/View/29197|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2-433쪽. 그런데, 바로 이 맥락에서[* 마태오와 루가에서는 입성 다음에 곧바로 일어난다. 마르코에서는 하루 뒤.] 예수는 마치 '''예루살렘의 왕권을 주장하듯이(!)''' 성전으로 향한다. >그분은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오해를 감수하셔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 오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삼는 것이 예수님에게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대한 입성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그분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다. 이 하느님의 다스림이 어디서나, 특히 수도 예루살렘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선포될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다스림을 대리하는 당신 자신을 통해 '표징 안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성전 정화도 필요한 것이다. 이 성전 정화는 바로 이 도시를 당신 소유로 차지하는 일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갈릴레아에서의 활동 이후 이제 수도에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이 메시아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대리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면, 그분이 성전을 제쳐놓으실 리 없다. 여기에도 옛 원칙이 통한다. '''곧, 임금이나 통치자가 성전 책임자라는 원칙이다.'''[* (책 속 주석)이 점은 [[https://de.wikipedia.org/wiki/Marius_Reiser|마리우스 라이저]]가 내게 지적해 주었다. 로마 지배 아래에서 자기 임의로 대사제를 해임하거나 임명했던 이들로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영주,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 로마 행정관들, 아그리파 1세와 2세, 칼키스의 헤로데 등이 있다. 임명권을 행사했던 이들의 인명에 따른 전체 목록은 [[https://en.wikipedia.org/wiki/Emil_Sch%C3%BCrer|E.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175 B..D.-A.D. 135)''. A New English Version revised and edited by G. Vermes, F. Millar and M. Black, Vol, II, Edinburgh 1979,229-2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Josephus, ''Antiquitates'' 20,224-251 참조.] 따라서 입성과 연결된 성전 정화는 결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이심을 예루살렘에서 선포하는 일에 성전의 모든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아니 최우선적으로 해당된다. 따라서 거의 필연적으로 성전 정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2 ''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5-437쪽 물론 예수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를 자처하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오해를 낳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도성과 성전에 대한 어떤 왕권을(그러나 정치적 왕권이라 할 수 없는 종말론적 왕권을) 주장한 것이다. 공관복음서들에서는 예수의 성전 정화 및 예수의 성전에서의 설교로 인해 군중들이 예수에게 관심을 가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 중 첫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하며 제사장들의 반응이 별 달리 특별하게 묘사되지 않으며, 예수는 그저 상인들에게 비난과 빈정거림을 들은 것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이런 차이 때문에 성전 정화 사건이 사실 2번 있었다는 식의 해석이나, 성전 정화 사건은 순전한 창작이라는 해석도 존재하나, 학계의 중론은 성전 정화 사건 자체는 실재했으며 공생애 초반이건 후반이건 한번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전 정화 행동은 예수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당연히 예수님이 이 광대한 구역을 다 '정화'하시기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오늘날 주석가들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란 말을 더 즐겨 쓴다. 시위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이 몇개의 탁자와 의자들을 둘러엎으시고 성전 구역을 가로질러 짐을 나르는 이들을 꾸짖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분의 행동은 하나의 표징일 수밖에 없었다. > >...'''예루살렘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가이 사제 귀족층은 성전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가 예수님에 의해 의문에 처해진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간파했다.''' 이미 토라를 둘러싼 갈등이 율법 해석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듯이, 여기서도 성전 운영에 관한 주변부 문제들, 이를테면 '''환전상들과 비둘기 장수들이 성전 규역보다 도성 안에서 장사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메시아|예루살렘의 예배를 온통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신 복음 선포의 빛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는 권한, 그리하여 이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곧 이스라엘의 가장 권위 있는 종교 기구인 최고 의회가 정확히 이를 문제삼고, 단호히 부정한다.''' > >예수님은 성전 정화 행동을 통해 성전에 대한 전권을 주장하신다. 물론 적대자들은 이를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행동이 그분의 죽음을 불러일으켰음이 분명하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2 (마르 11,18)}}} >---- >-《예수 마음 코칭 - 평신도를 위한 역사 비평학》{{{-2 ''Jesus von Nazaret - Was er wollte, wer er war''}}}, 게르하르트 로핑크{{{-2 ''Gerhard Lohfink''}}} 씀, 김혁태 옮김, 438-442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